‘만남’을 다른 말로 하면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관계는 그 사이가 멀 수도, 가까울 수도, 길거나 짧을 수도 있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인생의 교차점에서 동행한다. 그렇게 인생이란 길 위에서 오랫동안 동행하는 관계가 있고 잠시 스쳐지나가는 관계도 있다. 하지만 결국 삶은 홀로 가는 것이기에 언제부터인가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기대는 내가 만든 것으로, 상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혼자 괜한 기대를 품고는 이에 못 미치면 서운함이나 상처를 받고 상대를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들은 흔히 말한다.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힘든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사람에게 받는 상처와 누군가로부터의 표적이 되는 것은 감당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어릴 때부터 나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과 비방에 직면하곤 했다. “차진엽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라는 말을 많이 접하며 살았고, 지금도 종종 듣고 있다. 그런 떠도는 말들에 휘둘리지 않고 내 중심을 잡으려고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부단히 작업에만 매진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겉으로 강해지려고 하는 만큼 속은 무너지고 힘든 나날들이 많고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내 편이 되어주는 동행인들 덕분에 지탱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관계에는 인연(善緣)과 악연(惡緣)이 있다. 해가 바뀌고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보니 그 인연들이 절로 떠오르며 다시금 고마운 마음이 커졌다. 내가 지금의 모습일 수 있는 것은 그 인연들이 보이지 않게 나를 부축해주고 다리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며,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 그것을 건넌 것이라 생각한다. 

그중 고맙고도 늘 마음이 쓰이는 분이 계신다. 2015년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만나게 된 그분이 내 인생의 귀인이 될 줄은 몰랐다. 아주 마르고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그분의 모습은 여느 나이 든 분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예민해 보일 수 있는 마른 체구와는 달리 소탈하고 선하게 웃는 모습이 장난기 많은 소년 같았다. 그분은 우리나라 1세대 마임이스트인 김성구 선생님이신데, 소박하고 겸손한 말투로 내게 공연 제안을 하셨다. 멋쩍은 미소도 간간이 보이며 부끄러워하시는 모습에 단호한 결의가 느껴졌다. 이런 어른과 작업한다는 것이 무척 의미 있는 일이겠다고 생각하며 연습을 시작했다. 

<매화송 梅花頌>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주최했고 <2015다원예술프로젝트 MMCA퍼포먼스>의 일환으로 ‘김성구 마임 40년’을 기념한 퍼포먼스였다. 내 역할은 매화였는데, 선생님은 내게 매화 중에서도 ‘백매(白梅)’라고 하셨다. 그 표현이 무척이나 기분 좋게 들리면서 ‘내가 어떤 사람이구나’를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나를 ‘진엽 아씨’라고 부르곤 하셨는데, 얼마 전 한 강연에서 나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선생님은 나를 “도도하고 당당한 춤꾼”이라고 표현해주셨다.   

공연 후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은 오랫동안 간직했던 소중한 것을 내게 건네주셨다. 아니 물려주신 거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것은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자료였는데, 어찌나 감동적이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는지…. 수십 년은 품고 계셨을 그 귀한 자료를 후배 예술가에게 물려준다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의미였지 않을까. 나는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최승희 도록과 사진들이 스크랩된 자료들을 열어봤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최승희가 내게 직접 건네준 것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었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이 잘 기억나진 않지만, ‘이 시대의 최승희가 되어라’라는 말처럼 들렸다. 

집으로 돌아와 자료를 다시 검토하며 최승희에 대해 검색하고 그녀의 옛 영상들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무용가로서의 최승희는 알고 있었지만, 이 자료들이 내 것이 된 지금 뭔지 모를 그녀의 마음이 깊게 느껴지는 듯했다. 일제 강점기에 춤꾼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시절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개척해낸 선구자로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괜스레 연민이 들며 마음이 뜨거워졌고, 무언가 사명을 받은 것처럼 마음 깊숙이 자긍심 같은 것이 생겨났다. 무용의 길을 가며 인정도 받고 상도 많이 받고 좋은 성과를 이루며 겉보기에는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마음속에는 늘 큰 구멍이 뚫려있는 듯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선물은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닌 그 구멍이 메워지는 기분으로 바꿔주었다.    

선생님은 한 번씩 만날 때면 내게 귀한 것들을 쥐어주셨다. 해외 유명 무용단에서 제작한 주화나 잡지 등 구할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쌓일 때마다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에 고마움과 자기 확신, 자신감도 쌓여갔다. 나를 특별하고 가치 있게 바라봐주신 고마운 분, 나조차도 몰랐던 나의 진가를 발견해주신 분, 보고 싶은 선생님. 글을 마치며 연초에 태백에서 보내오신 메시지를 덧대어 보고픈 마음을 담아본다. “진엽 아씨. 오랜만에 불러보네요. 난 아무 거리낄 것 없이 맘 편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근일에 꼭 한번 연락드리고 뵙도록 하겠습니다. 매사가 든든한 분이니 덧붙일 게 없어요. 그저 건강하시구~ 여전히 진엽 아씨 응원합니다. 그래서 나도 즐겁고.”

*한국예술종합학교 현대무용 학사, 영국 런던컨템포러리댄스스쿨 현대무용 석사. 영국 호페쉬 쉑터 무용단 단원, 네덜란드 갈릴리 무용단 단원 역임. 무용예술상 연기상(2009),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14) 등 수상.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개폐회식 안무감독(2018). 現 콜렉티브에이 예술감독.